지난 2년여동안 계속되어 왔던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을 종식시키는 휴전이 이번달 초에 선포되었습니다. 이번 휴전 협정이 실질적인 휴전으로 이어질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있지만, 부디 이번 휴전으로 가자에서 학살이 멈추고 일상이 돌아오길 간절히 바랍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휴전을 이끌었다며 스스로를 노벨 평화상감이라고 했다지만, 사실 휴전은 폭력의 종식과 평화를 바라는 전세계 사람들의 관심과 연대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이탈리아에서는 항만노조가 이스라엘 무기 수출에 항의하며 이스라엘행 화물 하역을 거부하는 연대파업을 전개했고 서울, 제주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음식, 물, 의료품 등 인도적인 지원마저 봉쇄해온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항의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중 최근 우리의 눈길을 끌었던 건 구호품을 싣고 가자로 향한 전세계의 선박들이었습니다. 한국인 활동가 해초가 탑승해 화제가 되었던 천개의 매들린 호와 또 다른 대규모 구호선단 글로벌 수무드 함대(Global Sumud Flotilla)는 각각 30개국 출신의 150명의 참가자, 44개국 출신의 500여명의 참가자와 구호물자를 싣고 9월과 10월에 가자로 출발했습니다.
저는 사실 가자 구호 선박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어요. 몇 달 전 그레타 툰베리가 탄 선박이 나포되어 구금됐다 풀려났다는 걸 뉴스로 들은 정도였죠. 그러다 제가 매우 좋아하는 프랑스 배우 아델 에넬이 이번 글로벌 수무드 함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전 바르셀로나 시장 아다 콜라우, 유럽의회 의원들과 같은 정치인과 세계 각국의 활동가들과 함께요.
매일 바다 위에서 소셜미디어로 소식을 전하는 아델 에넬을 통해 소식을 전해들으며 그들이 이번에는 꼭 가자에 도착하길 기도했어요. 봉쇄된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들의 도착은 구호물자 이상의 연대와 위로의 메시지일테니까요.
그러나 수십척의 배 중 가자지구의 땅에 도달한 배는 없었습니다. 모두 공해 상에서 이스라엘 군에 나포되어 가혹한 환경으로 악명높은 교도소에 수용되었다 풀려났습니다.
이 와중에 트럼프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불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불발’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적절한가는 차치하고라도, 노벨평화상과 트럼프를 둘러 싼 해프닝이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이민자들을 공격하고 성소수자를 비난하고 시위진압을 위해 도시 곳곳에 군대를 배치하며 공포와 적대감을 조성해온 트럼프가, 가자지구 휴전과 인도주의적 접근 허용을 요구하는 유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트럼프가 평화상이라니요.
도대체 평화란 무엇일까요? 평화학자이자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은 "평화는 갈등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극심한 갈등 상황을 견디는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평화는 상태가 아니라 관계다.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의 위로. 나는 그런 평화를 기원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누군가 가자 휴전과 관련해 노벨평화상을 받는다면, 그건 트럼프가 아니라 가자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침묵하지 않고, 구호물자를 싣고 배를 띄워 가자로 향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고 지켜보며 십시일반 돈과 마음을 보태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갈등을 견디는 힘이며 버림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의 위로인 평화일테니까요.
외교적 전쟁이 아니더라도, 동료와, 친구와, 가족과의 갈등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내면의 전쟁을 수없이 마주합니다. 그럴 때 저는 평화가 갈등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견디는 힘이라는 말을 애써 떠올리려고 해요. 물론 갈등을 견디는 건 쉽지 않아요. 도망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주변을 둘러보며 산다면, 저에게도 당신에게도 조금씩 갈등을 견디는 힘이 생길 거라고 믿어요.
이상하리만치 더운 가을과 가을 장마가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이때, 평화의 힘이 가자의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따뜻한 불을 밝혀주길 바랍니다.
하자 판돌 흐른 드림 |